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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순 ㅣ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
학고재는 2026년 2월 25일(수)부터 3월 28일(토)까지 엄정순(b. 1961)의 개인전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을 연다. 엄정순은 시각장애인 미술 교육 프로젝트를 이끌어오며 ‘보는 것’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약 천 권의 점자책 설치와 함께, 대표작 ‘코없는 코끼리’의 조각 및 회화 작업을 선보인다. 점자책과 조형 작업은 시각에 의존해온 기존의 감상 방식을 넘어 감각의 다양성과 인식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남는 흔적을 통해 ‘본다’는 행위의 본질을 다시 사유하게 하며, 손끝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감각의 진동은 촉각과 청각, 신체 전반의 감각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시각 중심적 관념을 흔들며, 감각과 인식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장을 제안한다.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비롯된 이번 전시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는 ‘보푸라기’는 신체적 접촉에 의해 생긴 결과물, 즉 촉각적 사건이다.
보푸라기는 반복된 마찰 속에서 우연적으로 형성되는 미세한 잔여물로 의도된 형상이나 명확한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는 제도적 기록이나 언어로 포착되지 못한 경험이 남기는 흔적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미세한 잔여를 통해 감상이 단순히 이미지를 해석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체적 경험과 시간의 축적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라짐과 흔적의 관계 또한 중요한 층위로 다뤄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는 과정으로 제시된다.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경험은 명확한 이미지나 서사로 환원되지 않은 채 신체에 머문다. 이는 언어와 시각 중심의 기록 체계가 포착하지 못하는 기억의 방식이다.
작가는 선명한 시각적 대상이나 단일한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공간 안에서 멈추고, 더듬고, 방향을 재설정하는 경험을 허용한다. 익숙한 인식의 구조를 잠시 유예시키며, 감각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조건을 다시 사유하도록 이끈다.
이 전시는 감각의 위계를 재고하며, 우리가 어떤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신뢰해왔는지를 질문한다.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은 유동적인 감각의 순간들을 따라가며,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리로 남는다.


